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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텐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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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이텐 전투는 1757년 7년 전쟁 중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거둔 결정적인 승리이다. 이 전투는 프로이센군이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 대왕의 뛰어난 전략과 훈련된 병력을 바탕으로 오스트리아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로이텐 전투는 프로이센이 슐레지엔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프리드리히 대왕의 군사적 명성을 드높였다. 또한, 사선 대형을 활용한 프로이센군의 전술은 이후 전격전의 시초로 평가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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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텐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Carl Röchling의
"프로이센 척탄병의 돌파구 습격", 카를 뢰흘링
전투명로이텐 전투
일부제3차 슐레지엔 전쟁
전쟁7년 전쟁
날짜1757년 12월 5일
장소슐레지엔 로이텐 (현재 폴란드 루티냐)
좌표51°09′08″N 16°45′09″E
결과프로이센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프로이센 왕국
교전국 2오스트리아
지휘관 및 병력
지휘관 1프리드리히 2세
지휘관 2카를 알렉산더 폰 로트링겐
지휘관 2 (공동)요제프 폰 다운
병력 136,000명
포병 1167문
병력 265,000명
포병 2210문
피해 규모
피해 1전사 1,141명, 부상 5,118명, 포로 85명, 총 6,344명
피해 2전사 3,000명, 부상 7,000명, 포로 12,000명, 총 22,000명, 포획된 포 116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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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보

2. 배경

프리드리히 대왕은 중부 독일에서 로스바흐 전투를 통해 프랑스-신성로마 연합군을 격파하고, 오스트리아군이 슐레지엔을 조금씩 탈환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11월 28일, 슐레지엔의 수도 브레슬라우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프리드리히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로이텐(Leuthen, Lutynia)으로 이동했으나, 병력 규모가 오스트리아군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대왕은 패배보다는 영광스러운 승리를 원했고, 로트링겐의 카를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은 브레슬라우에서 출진하여 프로이센군과 맞서게 되었다. 전투 당일 안개가 짙게 꼈지만, 프리드리히 대왕과 프로이센군은 이전에 이 지역에서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지형을 훤히 알고 있었다.

2. 1. 7년 전쟁

아헨 조약 체결 당시 유럽 지도. 오스트리아는 노란색, 프로이센은 새로 얻은 실레시아를 포함하여 보라색으로 표시됨
아헨 조약 체결 당시 유럽. 오스트리아는 노란색, 프로이센은 새로 획득한 실레시아를 포함하여 보라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7년 전쟁은 세계적인 규모의 분쟁이었지만, 직전에 종결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년-1748년)과 관련된 유럽 전장이 중심이었다. 1748년 아헨 조약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의 전쟁을 종식시켰지만, 그것이 일시적인 것임은 명백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프리드리히 대왕으로 알려짐)는 부유한 실레시아를 획득했지만, 더 많은 작센 영토를 노리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는 군사력을 재건하고 새로운 동맹을 맺을 시간을 벌기 위해 조약에 서명했고,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세력을 재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30] 1754년, 북아메리카에서 영국과 프랑스 간의 긴장 고조로 인해 여제는 빼앗긴 영토를 되찾고 프로이센의 확장에 대항할 기회를 얻었다. 대서양 무역에서 영국의 지배를 깨뜨리기를 원했던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의 오랜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동맹을 맺었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직면한 영국 국왕 조지 2세는 조카 프리드리히와 프로이센 왕국과 동맹을 맺었다. 이러한 일련의 국제 외교적 격변은 외교 혁명으로 불린다.[31]

1756년 7년 전쟁이 발발하자 프리드리히는 작센을 침략하고 보헤미아로 진군하여 1757년 5월 6일 프라하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 프랑스군이 동맹국의 영토인 하노버에 침입했다는 것을 알게 된 프리드리히는 서쪽으로 이동했다. 1757년 11월 5일, 약 1,000명의 보병 연대와 1,500명의 기병대는 로스바흐 전투에서 30,000명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단 90분 만에 격파하여 서쪽의 위협을 줄였다. 그러나 그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오스트리아군은 실레시아 탈환을 추진하고 있었다. 여제의 의붓동생인 카를 공자는 슈바이트니츠를 점령하고, 이어 브레스라우 전투에서 승리하여 실레시아 방어를 맡고 있던 브라운슈바이크-베베른 공 아우구스트 빌헬름(왕비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의 사촌)을 포로로 잡고 브레스라우를 함락시켰다.[32]

실레시아로 돌아가는 도중 프리드리히는 11월 하순에 브레스라우 함락 소식을 들었다. 그와 그의 지휘하에 있는 22,000명의 군대는 12일 동안 274km를 이동하여 뢰그니츠에서 브레스라우 전투에서 살아남은 프로이센군의 잔존 부대와 합류했다. 약 167문의 대포를 갖춘 총 약 33,000명의 군대는 로이텐 근처에 도착하여 66,000명의 오스트리아군과 대치했다.[33]

2. 2. 오스트리아-프로이센 갈등



7년 전쟁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년-1748년) 이후 유럽에서 벌어진 주요 분쟁이었다. 1748년 아헨 조약으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의 전쟁은 끝났지만, 이는 일시적인 평화에 불과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프리드리히 대왕)는 실레시아를 차지했지만, 작센 영토를 추가로 확보하려 했다.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군사력을 강화하고 새로운 동맹을 맺기 위해 조약에 서명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영향력을 회복하고자 노력했다.[30]

1754년, 북아메리카에서 영국과 프랑스 간 긴장이 고조되면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 프로이센의 성장을 견제할 기회를 잡았다. 프랑스는 대서양 무역에서 영국의 주도권을 약화시키기 위해 오스트리아와 오랜 갈등을 딛고 동맹을 맺었다. 이러한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영국 왕 조지 2세는 자신의 조카인 프리드리히와 프로이센 왕국과의 동맹을 선택했다. 이 일련의 외교적 변화는 외교 혁명으로 불린다.[31]

2. 3. 외교 혁명



1748년 아헨 조약으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종식되었지만,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의 갈등은 여전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실레시아를 획득했지만, 작센 영토를 추가로 노리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군사력을 재건하고 새로운 동맹을 맺기 위해 조약에 서명했다.[1]

1754년, 북아메리카에서 영국과 프랑스 간의 긴장이 고조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실레시아를 되찾고 프로이센의 성장을 견제할 기회를 포착했다. 프랑스는 대서양 무역에서 영국의 지배력을 약화시키고자 오스트리아와 오랜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동맹을 맺었다. 이에 영국 왕 조지 2세는 조카인 프리드리히 2세와 동맹을 맺었다. 이러한 일련의 국제 외교적 격변은 외교 혁명으로 불린다.[2]

3. 전투 전 상황

프리드리히 대왕이 중부 독일에서 프랑스-신성로마 연합군을 격파하기 위한 로스바흐 전투를 벌이는 동안, 오스트리아군은 조금씩 슐레지엔을 탈환하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11월 28일 슐레지엔의 수도인 브레슬라우가 오스트리아군에게 함락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리드리히는 재빨리 움직여 로이텐에 도착하였고, 상대해야 할 오스트리아군 숫자가 자신이 지휘하는 프로이센군의 두 배나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8]

프리드리히 대왕은 평소처럼 끔찍한 패배보다는 영광스러운 승리를 얻고 싶었다. 오스트리아군 수뇌부에서는 브레슬라우에서 나가 프리드리히와 맞설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고, 결국 로트링겐의 카를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오스트리아군은 출진하였다. 전투 날 안개가 껴 있었으나, 이 주변 지역은 프리드리히 대왕이 병사들을 훈련시킨 적이 있던 곳이었기에 프로이센군과 프리드리히 대왕은 주변 지형지물에 대하여 상세히 알고 있었다.

3. 1. 프로이센군의 상황

프리드리히 대왕이 중부 독일에서 프랑스-신성로마 연합군을 격파하기 위한 로스바흐 전투를 벌이는 동안 오스트리아군은 조금씩 슐레지엔을 탈환하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11월 28일 슐레지엔의 수도인 브레슬라우가 오스트리아군에게 함락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리드리히는 재빨리 움직여 로이텐에 도착하였고, 상대해야할 오스트리아군 숫자가 자신이 지휘하는 프로이센군의 두 배나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8]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전에 병사들을 훈련시킨 적이 있던 로이텐 주변 지역의 지형지물에 대하여 상세히 알고 있었다. 1757년 12월 4일, 그는 보르네에서 서쪽으로 약 1.5km 떨어진 쇠넨베르크 언덕에서 장군들과 함께 익숙한 풍경을 살폈고, 작전 계획을 세웠다. 그의 앞에는 오스트리아군 전열과 거의 평행한 축을 따라 낮은 구릉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는 슐라이어베르크, 조피엔베르크, 바흐베르크, 부터베르크 등 그 구릉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구릉이라기보다는 작은 언덕에 가까웠지만, 그의 군대를 은폐하기에 충분한 높이였다. 두 배나 되는 적군을 상대해야 했던 그는 자군의 전술 훈련에 의존하고 지형을 이용하여 병사들을 최적의 위치로 이동시켜야 했다.[8]

프리드리히는 유럽 최정예 군대 중 하나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의 군대는 어떤 중대든지 분당 최소 4회 이상 일제사격을 할 수 있었고, 일부 중대는 놀랍게도 분당 5회의 사격을 할 수 있었는데, 이는 다른 유럽 군대의 사격 속도의 두 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러시아군만이 그에 근접한 사격 속도를 달성할 수 있었다. 프로이센군은 유럽의 어떤 군대보다 기동성이 뛰어나고 행군 속도가 빨랐으며, 로스바흐 전투에서 압승을 거둔 직후였다. 그의 포병은 신속하게 배치 및 재배치하여 보병을 지원할 수 있었다. 그의 기병은 훌륭한 훈련을 받아 말과 말이 나란히, 기수와 기수가 나란히 움직이며 전속력으로 기동하고 돌격할 수 있었다.[3]

보병 대형, 머스켓과 총검, 말을 탄 장교; 이미지는 역사적 정확성이 특별히 높지 않음.
로이텐으로 진군하는 프로이센 군대. 카를 레히링크의 상상도 (c. 1890)


프로이센 보병은 남쪽으로 진군하여 오스트리아군의 시야에서 벗어난 낮은 언덕 줄 뒤에 머물렀다. 훌륭하게 훈련된 프로이센군은 행군 중에도 소대 간 간격을 각 소대 전방의 너비와 정확하게 유지했고, 선두가 오스트리아군 좌익 정면을 통과한 후 적을 향해 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오스트리아군 좌익 남쪽으로 우회했다. 로베틴츠에서 병사들이 좌향하여 횡대를 전개했고, 오스트리아 좌익의 가장 취약한 지점에 대해 거의 직각으로 프로이센군은 전열을 2~3명의 병사가 전후로 나란히 서는 형태로 형성했다. 마찬가지로, 한스 요아힘 폰 찌텐의 기병대는 오스트리아군 전면 전체를 가로질러 적군 측면에 대해 45도 각도로 배치되었다.

프로이센 포병대는 부터베르크 언덕 뒤쪽에 위치하여 오스트리아군의 시야에서 숨은 채 보병 공격에 맞춰 포격 시기를 조절하고 정상으로 이동할 준비를 했다.[33] 재배치된 프로이센군 대부분은 오스트리아군 전선의 가장 취약한 부분에 집중되었다. 오스트리아 우익에 남아 있는 프로이센 기병대와 보병의 소규모 예비대는 적군 앞에서 기만 작전을 계속하면서 마치 그곳에서 공격이 이루어질 것처럼 더 북쪽으로 이동했다.[36]

3. 2. 오스트리아군의 상황

프리드리히 대왕이 로스바흐 전투에서 프랑스-신성로마 연합군을 격파하는 동안, 오스트리아군은 슐레지엔을 조금씩 탈환하고 있었다. 11월 28일, 슐레지엔의 수도 브레슬라우가 오스트리아군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로이텐에서 자신의 군대보다 두 배나 많은 오스트리아군과 마주하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접근을 인지한 카를 공과 레오폴트 요제프 폰 다운 백작은 서쪽으로 약 8km의 전선을 형성하고 구릉지대에 군대를 배치했다.[4] 카를 공은 군대를 두 열로 배치하고 우익은 북쪽 끝 니페른에, 로이텐은 오스트리아군 중앙에 위치시켰다. 카를은 교회 탑을 관측소로 사용하고 마을에 7개 대대를 배치하여 지휘소를 설치했으며, 군대의 대부분을 우익에 배치했다.[4]

보르네에는 소규모 전초기지가 있었으나, 프리드리히 대왕의 도착에 동쪽으로 철수했다. 오스트리아군 진영은 보르네와 브레슬라우 사이 주요 도로와 직각으로 교차하여 프로벨비츠와 리사를 통과했다. 8개의 척탄병 중대로 니페른을 확보하고 기병대를 구커비츠(현재 코코르지체)에 배치했다. 오스트리아군 전선은 남쪽으로 사크슈츠(현재 자크르지체)까지 확장되었고, 기병대가 보병과 직각으로 배치되어 사크슈츠와 고흐라우 사이 전선을 형성했다. 이 위치는 척탄병과 초병들로 보강되었다. 병사들은 마을과 숲을 채웠고, 교목 벌채 방어선과 요새를 만들었다. 초병들은 모든 통신 지점과 도로, 길의 교차점을 지켰다. 좌익은 가장 짧았고, 기병대는 고흐라우 마을 근처 개울가 끝에 배치되었다. 카를은 군사 국경지대 부대와 신성 로마 제국 군대 소속 뷔르템베르크 공국, 바이에른 공국 군대를 포함한 합스부르크 군대의 혼성 부대를 지휘했다.[7]

오스트리아군은 좌익에 나타난 프로이센군의 목적을 곧 파악했다. 현장 오스트리아군은 90도 회전하여 프로이센 전선을 향한 얕은 도랑을 이용해 저항을 시도했다. 좌익 지휘관 프란츠 레오폴트 폰 나다슈디는 카를 공작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무시당했다.[39] 정오가 되어도 카를 공작은 적의 목표가 북쪽이라고 믿었다.[39] 오스트리아군 선두 전열 병사 대부분은 루터교 프로이센인과 싸울 의욕이 의심스러웠던 프로테스탄트 군대인 뷔르템베르크군이었다. 뷔르템베르크군은 저항 없이 퇴각했고, 바이에른군도 격파되었다.[40]

4. 지형 및 병력 배치



로이텐 전투는 실레시아 지방의 브레슬라우(현재 브로츠와프) 인근에서 벌어졌다. 이 지역은 대체로 평탄하고 완만한 구릉이 있는 초원 지대로, 전투 당시 양측 군대의 배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 카를 공은 넓은 평원에 걸쳐 군대를 길게 배치했다. 그의 군대는 서쪽으로 약 8km에 걸쳐 펼쳐져 있었으며, 최북단 우익은 니펠른(Nipern) 마을, 중앙은 로이텐(Leuthen) 마을, 좌익은 고흘라우(Gohlau) 마을 근처에 배치되었다. 카를 공은 로이텐 교회 탑을 감시소로 삼아 지휘했다.

프로이센군 총사령관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군의 이러한 긴 전열 배치를 이용하여 사선대형을 활용한 측면 공격을 계획했다. 그는 먼저 기병대를 보내 오스트리아군 우익을 공격하는 척 양동작전을 펼쳐 오스트리아군의 주의를 분산시켰다. 그 후, 주력 부대인 보병대를 낮은 언덕 뒤로 우회시켜 오스트리아군 좌익의 가장 취약한 지점을 공격했다.

4. 1. 로이텐 지역의 지형

하부 실레시아 지방은 대부분 비옥한 땅의 구릉성 평원이다.[5] 브레슬라우(브로츠와프) 근처와 강 계곡에는 검은색과 충적토 토양이 있으며, 모래 토양과 혼합되어 있다. 오더 강과 수데텐 산맥 기슭 사이에는 온화한 기후, 비옥한 토양, 광대한 수계가 있어 귀중한 농업 자원이 되었다.[6]

브레슬라우 북서쪽 지역은 가파른 언덕이 없어 적의 접근을 쉽게 관찰할 수 있었고, 비교적 평평한 지형 때문에 은폐 기동이 제한적이었다. 충적토의 존재는 1758년 프리드리히 2세가 쿠너스도르프 전투에서 맞닥뜨렸던 것보다 덜하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군대의 통행을 막는 자연 늪을 제공하거나 행군하는 군인과 말 발굽 소리를 줄이기에 충분할 정도로 비교적 부드러운 지면을 보장했다.[7] 로이텐 주변 지역에는 여러 개의 작은 마을과 촌락이 있었다.

  • 북쪽: 약 5.6km 떨어진 니페른, 로이텐과 니페른의 중간 지점에 있는 프로벨비츠
  • 남동쪽: 약 3km 떨어진 고흘라우
  • 동쪽: 약 6.1km 떨어진 리사 (현재 브로츠와프의 구역)


오데르 강과 그 지류를 가로질러 보르네, 로이텐, 리사 마을을 브레슬라우와 연결하는 도로가 있었다.[7]

4. 2. 프로이센군의 배치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군의 중앙에 있는 로이텐을 향해 바로 진군했다. 당시 오스트리아군은 4마일에 걸쳐 전열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이는 프리드리히가 즐겨 쓰는 측면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였으나, 결과적으로 큰 실수였다. 프리드리히는 기병대에게 보르나(Borna) 마을에 돌격하여 오스트리아군 우익과 맞서게 하는 양동작전을 펼쳤다. 이 기병대의 움직임은 프로이센군이 오스트리아군의 오른쪽 측면을 공격하려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로써 프로이센군은 기병대의 양동작전으로 자신들의 진짜 목표를 숨길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정예 보병대와 함께 오스트리아군의 좌측 종대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1.프로이센의 양동작전으로 오스트리아군의 주위를 끌다


2.프리드리히 군대는 언덕을 돌아 오스트리아 군대의 측면을 공격했다


프로이센 보병은 남쪽으로 진군하여 오스트리아군의 시야에서 벗어난 낮은 언덕 줄기 뒤에 머물렀다. 훌륭하게 훈련된 프로이센군은 행군 중에도 소대 간 간격을 정확하게 유지했고, 선두가 오스트리아군 좌익 정면을 통과한 후 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오스트리아군 좌익 남쪽으로 우회했다. 로베틴츠에서 병사들이 좌향하여 횡대를 전개했고, 오스트리아 좌익의 가장 취약한 지점에 대해 거의 직각으로 전열을 형성했다. 이때 프로이센군은 2~3명의 병사가 전후로 나란히 서는 형태였다. 마찬가지로, 한스 요아힘 폰 찌텐의 기병대는 오스트리아군 전면 전체를 가로질러 적군 측면에 대해 45도 각도로 배치되었다.

프로이센 포병대는 부터베르크 언덕 뒤쪽에 위치하여 오스트리아군의 시야에서 벗어나, 보병 공격에 맞춰 포격 시기를 조절하고 정상으로 이동할 준비를 했다.[33] 재배치된 프로이센군 대부분은 오스트리아군 전선의 가장 취약한 부분에 집중되었다. 오스트리아 우익에 남아 있는 프로이센 기병대와 소규모 보병 예비대는 기만 작전을 계속하면서, 마치 그곳에서 공격이 이루어질 것처럼 더 북쪽으로 이동했다.[36]

4. 3. 오스트리아군의 배치

카를 공(칼 대공)은 프리드리히의 접근을 알아차리고, 구릉이 있는 평원에서 서쪽으로 8km에 걸쳐 전선을 형성했다.[33] 군대를 2열로 배치하고, 최북단 우익에 니펠른을 배치했다.[36] 로이텐은 오스트리아군의 중심에 있었고, 카를 공은 교회 탑을 감시소로 삼아 지휘소를 설치하고 마을 자체에 7개 대대를 배치했다. 오스트리아군 대부분은 우익에 배치되었다.[33] 볼네에는 소규모 전위 주둔지가 있었지만, 프로이센군이 도착하자 동쪽으로 후퇴했다. 오스트리아군의 진지는 프뢰벨비츠와 리사를 통과하는 볼네와 브레슬라우를 잇는 주요 도로와 직각으로 교차했다. 카를 공은 8개의 척탄병 중대로 니펠른을 확보하고, 기병대를 구켈비츠(현재 코콜지체, 크레피체 마을의 일부)에 배치했다. 오스트리아군 전선은 자구슈츠(현재 자크지체)까지 남쪽으로 이어졌고, 거기서 기병대가 보병에 대해 동쪽으로 직각으로 꺾이는 위치에 배치되어 자크슈츠와 고라우 사이에 전선을 형성했다. 그 진지는 추가적인 척탄병과 감시대로 확보되었다. 군대는 마을과 숲을 메우고, 서둘러 역모목과 보루를 만들었다. 피켓(Picket)은 도로와 오솔길의 교차점과 같은 모든 연락망을 지키고 있었다. 좌익은 짧았고, 기병대는 고라우 마을 근처의 개울 근처 먼 끝에 배치되어 있었다. 카를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군대를 통솔했는데, 그 안에는 군정국경지대(Militärgrenze)에서 온 파견대와, 뷔르템베르크 공국 및 바이에른 공국에서 온 신성 로마 제국군이 포함되어 있었다.[36]

오스트리아군은 좌익에 나타난 프로이센군의 등장에 놀랐지만, 그 목적은 곧 명확해졌다. 프로이센 보병은 측면을 휩쓸고 오스트리아 전선의 가장 약한 부분으로 진격했다. 현장의 오스트리아군은 자신의 전선을 90도 회전시켜 프로이센 전선을 향한 얕은 도랑을 이용해 저항을 시도했다. 좌익을 지휘하던 프란츠 레오폴트 폰 나다슈디는 카를 공작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무시당했다.[39] 프로이센군 대부분이 남쪽에 나타난 정오가 되어도 그는 적의 목표가 북쪽이라고 믿고 있었다.[39] 오스트리아군 선두 전열의 병사 대부분은 뷔르템베르크군이었는데, 이들은 루터교 프로이센인과 싸울 의욕이 의심스러웠던 프로테스탄트 군대였다. 뷔르템베르크군은 치열한 저항 없이 퇴각했고, 측면을 지원하기 위해 나다슈디가 배치한 바이에른군도 격파되었다.[40]

5. 전투 경과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군의 배치와 규모를 확인한 후,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이동하여 오스트리아군의 좌측면을 기습하는 사행 전술을 펼쳤다. 오스트리아군은 프로이센군의 기동을 오판하여 전력을 분산시키는 실수를 저질렀다.

5. 1. 오스트리아군의 대응과 붕괴

오스트리아군의 사령관 로트링겐 공 카를 알렉산더는 교회의 첨탑 위에 있었지만, 프로이센군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는 프로이센군이 우익을 공격할 것이라 오판하고 예비대를 우익으로 보내 좌익을 약화시켰다. 심지어 프로이센군의 움직임을 보고 "그 멋진 친구들이 떠나는군. 그냥 그들이 가게 내버려두게."라고 말하며 안일한 태도를 보였다.[10]

그러나 프로이센군은 고도로 훈련된 군대였다. 이들은 오스트리아군의 좌익을 지나치다가 좌측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전투 대형을 갖추고 오스트리아군의 좌익을 공격했다. 이는 스파르타군과 유사한 기동이었지만, 당시 라인 전투가 보편화된 상황에서 이러한 측면 기동은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군의 가장 약한 부대가 좌익에 배치되어 있었고, 언덕을 방어선으로 삼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3. 측면 공격으로 오스트리아군은 혼란에 빠졌다.


프로이센 보병대는 2열 전열을 구성하여 오스트리아군의 측면을 붕괴시켰다. 특히 오스트리아 좌익에 배치된 뷔르템베르크 부대는 프로테스탄트로서 프로이센에 친근감을 가지고 있어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 다른 부대들은 프로이센군의 12파운드 포와 일제 사격에 쉽게 무너졌다.[11]

카를 공은 뒤늦게 군사를 좌익으로 이동시켜 로이텐에서 전열을 짜려 했으나, 이미 전열이 너무 길게 늘어져 있어 우익 병사들이 자리를 잡는 데 1시간 반이나 걸렸다.

4. 오스트리아군이 붕괴하다.


프로이센군은 포병대의 지원을 받으며 로이텐을 향해 돌격했고, 40분 만에 마을을 함락시켰다.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프로이센군의 측면을 공격하려 했으나, 프로이센 기병대의 압도적인 돌격에 저지당했다. 기병대끼리의 격전은 로이텐 후방의 오스트리아군 전열에까지 번져 혼란을 야기했고, 결국 오스트리아군 전열은 무너졌다. 전투는 3시간이 조금 넘게 지속되었고, 오스트리아군은 완패했다. 로트링겐의 카를 공은 "나는 이 패배를 믿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16]

프로이센군의 좌익 출현에 오스트리아군은 놀랐지만, 목표는 곧 명확해졌다. 프로이센 보병은 오스트리아군 전열의 가장 약한 부분으로 진격하여 측면을 포위하려 했다. 현장에 있던 오스트리아 대령들은 자체 전열을 90도 회전시키고 프로이센군 전열을 향한 얕은 도랑을 이용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측면을 지휘하던 프란츠 레오폴트 폰 나다시는 찰스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그의 요청은 무시되었다.[10]

최전방 오스트리아군 대부분은 뷔르템베르크인들이었는데, 이들은 루터교도인 프로이센군과 싸울 의향을 의심받았던 프로테스탄트 병력이었다. 뷔르템베르크인들은 버텼고, 프로이센군의 대규모 병력이 화약 연기 속에서 나타날 때까지 꾸준한 소총 사격을 유지했다. 그들은 그 후 목숨을 걸고 도망쳤고, 나다시가 자신의 측면을 지원하기 위해 배치한 바이에른 군을 휩쓸었다.

프리드리히 2세의 포병대의 지원을 받은 프로이센 보병의 첫 번째 파도는, 이제 작은 언덕 꼭대기에서 포격을 가하며, 뢰텐으로 꾸준히 밀고 들어갔다. 안할트-데사우의 모리츠가 지휘하는 노련한 보병과 척탄병은 프로이센 규정에 따라 1인당 60발의 탄약을 가지고 전투에 임했다. 그들이 오스트리아군 최전방을 압도했을 때, 그들은 이미 탄약이 바닥났다. 나다시는 자신의 소규모 기병대를 프로이센 척탄병 부대와 보병 지원 부대에 보냈지만 소용없었다. 나다시는 그의 부대를 혼란스럽게 퇴각시켰다. 찰스 왕자와 다운은 마침내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우익에서 좌익으로 병력을 급파했지만, 원래 약 4km 길이였던 전선을 그날 이전에 프리드리히의 유인 작전에 대응하기 위해 재배치한 후 거의 10km로 확장했다. 오스트리아군이 후퇴하자 프로이센 포병은 사격으로 그들을 덮쳤다.[11]

프로이센 보병과 척탄병은 40분 만에 뢰텐에 도착하여 오스트리아군을 마을 안으로 밀어붙였다. 프로이센 척탄병들이 먼저 성벽을 돌파하고 교회를 급습하여 많은 수비병이 사망했다. 마을 전체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다. 샤를-조제프 라모랄은 당시 오스트리아 보병 연대의 대위였다.[12]

뢰텐은 큰 마을이 아니었고, 병력이 너무 밀집되어 30~100열의 깊이로 서 있었고, 살육은 끔찍했다. 라모랄은 나중에 그의 대대는 보통 1,000명 정도였지만, 헝가리인들과 자신의 중대에서 분리된 척탄병들과 함께 200명도 채 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그는 그들을 마을 가장자리 높이로 후퇴시켰고, 그곳에는 그들이 피할 수 있는 풍차가 있었다. 결국 비하르트 요아힘 하인리히 폰 묄렌도르프 대위가 지휘하는 프로이센 근위대가 마을 묘지를 돌파하여 그들이 자신의 위치를 포기하도록 강요했다.[12]

오스트리아군은 마을 북쪽 언덕에서 포대를 이동시켜 보병을 엄호했을 때 잠시 우세를 점했고, 포대의 사격으로 보병은 원래 전선에 직각으로 배치될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예비 좌익의 마지막 부대를 진격시키라고 명령함으로써 대응했지만, 오스트리아군 포대는 그것을 격퇴했다. 마침내 프리드리히의 중포병은 마을 서쪽에 있는 작은 언덕인 부터베르크에서 집중 포격을 가했다. 일부 참가자들은 그 집중 포격이 프로이센 보병보다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더 큰 공헌을 했다고 말했다.[12]

성벽 공격은 잠시 볼프 프리드리히 폰 레초 장군의 보병 전열을 노출시켰다. 왕자가 기병을 뢰텐으로 돌려보낸 지 2시간 이상이 지났지만, 기병은 때맞춰 도착했다. 조제프 백작 루체시 다베르나가 지휘하는 기병은 측면을 공격하기 위해 서둘렀는데, 그 중요한 순간에 성공적인 기병 돌격은 전투의 흐름을 바꿀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오스트리아군에게는 라닥스도르프에서 자이텐의 기병 40개 중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측면을 공격했으며, 게오르크 빌헬름 폰 드리젠이 지휘하는 또 다른 30개 중대가 전면을 공격했다. 바이로이트 용기병이 다른 측면을 공격했고, 푸트카메르 헝가리 기병이 후방을 공격했다. 루체시는 포탄에 목이 잘려 사망했고,[15] 그의 병사들은 흩어졌다. 기병 혼전은 곧 뢰텐 뒤편의 오스트리아 보병 전열로 소용돌이쳤고, 더 큰 혼란을 야기했다. 프로이센 기병에 압도된 오스트리아 보병은 붕괴되었다. 보병과 기병은 그 후 "검은 물"이라고 불리는 슈바이니츠 바이스트리츠 강을 건너 브레슬라우로 후퇴했다.[16]

5. 2. 전투의 결과

로이텐 전투는 프로이센군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다. 프로이센군은 오스트리아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반면 프로이센군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구분프로이센군오스트리아군
병력약 36,000명약 66,000명
사상자6,344명 (사망 1,141명, 부상 5,118명, 포로 85명)[52]22,000명 (사망 3,000명, 부상 7,000명, 포로 12,000명)[49]
기타 피해대포 손실 없음[52]대포 116문 손실[49]



이 전투는 오스트리아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병력과 화력에서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군은 프로이센군에게 완패했다. 로트링겐의 카를 공은 "나는 이 패배를 믿을 수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에 의해 레오폴트 요제프 폰 다운 백작으로 교체되었다.[52] 카를 공은 군에서 은퇴하여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총독으로 부임했다.[52]

전투 후, 프로이센군은 리사(Lissa)로 진격하여 하룻밤을 묵었다.[44]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기병대를 보내 오스트리아군을 추격하여 추가적인 피해를 입혔고, 브레슬라우를 포위하여 12월 19일에서 20일 사이에 항복을 받아냈다.[36]

로이텐 전투의 승리는 프로이센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오스트리아는 실레지아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했고, 프로이센의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이 전투는 오스트리아군에게 전술적 교훈을 남겼는데, 이후 오스트리아군은 평지에서의 전투를 피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지형을 선택하는 전략을 채택하게 되었다.[54]

전투가 끝난 후, 프로이센 병사들이 유명한 찬송가인 ''Nun danket alle Gott''(''이제 우리 모두 하나님께 감사하세'')를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그 진위는 확실하지 않다.[39]

6. 전투의 영향

로이텐 전투의 연기가 걷히자 프로이센 보병은 대열을 재정비하고 도주하는 오스트리아군을 추격할 준비를 했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프리드리히 대왕은 추격을 중단했다. 몇몇 병사들이 유명한 찬송가인 ''Nun danket alle Gott''(이제 우리 모두 하나님께 감사하세)를 부르기 시작했고, 결국 전군이 합창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 이야기는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10][17]

프리드리히는 리사를 향해 진격했다. 전투의 난민들로 마을이 가득 차 있었고, 그는 현지 성의 안마당에서 놀란 오스트리아 장교들을 발견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왕이 말에서 내린 후 정중하게 그들에게 "안녕하십니까, 신사 여러분. 제가 여기 있다는 것을 예상치 못하셨을 겁니다. 여기서 하룻밤 묵을 수 있을까요?"라고 말했다고 한다.[12]

하루 휴식 후, 12월 7일 프리드리히는 그의 기병 절반을 치텐과 함께 파견하여 쾨니히그라츠를 향해 후퇴하는 샤를의 군대를 슈바이츠니츠를 거쳐 추격하게 하여 2,000명의 병사와 그들의 수하물을 추가로 포획했다.[18][19] 나머지 군대와 함께 프리드리히는 브레슬라우로 진군했다.[47][48] 샤를의 군대를 보헤미아까지 추격함으로써 프로이센은 브레슬라우를 방어하는 연합군 수비대를 고립시켰다.[51]

살만 슈프레허 폰 베르네크[20]가 지휘하는 오스트리아-프랑스 연합군 1만 7천 명은 성벽과 해자로 견고하게 요새화된 브레슬라우를 사수하려 했다. 브레슬라우를 잃으면 실레지아에 대한 지배권과 명성이 훼손되고, 도시에 보관된 엄청난 양의 군수품을 잃게 되기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 사령관은 항복을 말하는 자는 즉시 교수형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12월 7일 프리드리히는 브레슬라우를 포위 공격했고, 오스트리아의 브레슬라우 및 그 지역 지배권의 미래는 어두워 보였다. 결국 브레슬라우는 12월 19일에서 20일 사이에 항복했다.[7]

6. 1. 7년 전쟁에 미친 영향

로이텐 전투의 승리로 프로이센은 슐레지엔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했고, 이는 7년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패배한 오스트리아군은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으며, 합스부르크 제국의 위신에도 큰 타격을 입었다.[36]

전투 후, 오스트리아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카를 공은 해임되었다. 이는 오스트리아군 지휘부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후 다운 백작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36]

프로이센군은 브레슬라우 포위전을 통해 브레슬라우를 점령함으로써 슐레지엔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더욱 확고히 했다.[36]

6. 2. 군사 전략 및 전술에 미친 영향

이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핵심 요인은 전투 초반의 작전 기동이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자신의 의도를 숨기고 완벽한 기습을 성공시켜 적의 약한 부분에 강력한 공격을 가하였다. 이는 베베군그스크리에그(Bewegungskrieg), 더 널리 알려진 용어로는 블리츠크리크(Blitzkrieg; '''전격전''')의 초기 형태라고 볼 수 있다.[10] 오스트리아군은 보헤미아로 후퇴했고, 슐레지엔은 프로이센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이 전투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위대한 승리이자, 당시 프로이센 보병대의 강력함을 세계에 알린 사건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신의 무능한 처남 카를 공의 사직을 요구하였다.

6. 3. 후대의 평가

로이텐 전투는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있어 그의 군사 경력 중 가장 빛나는 승리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전투는 18세기 선형 전술의 모범적인 사례로 꼽히며, 프로이센 보병대의 우수성을 입증한 전투였다.[52] 하루 만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가 그해 초에 브레슬라우와 슈바이트니츠에서 얻었던 모든 이점을 되찾았고, 실레지아를 탈환하려는 오스트리아의 시도를 좌절시켰다.[56]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 전투에서 몇 가지 중요한 전술적 혁신을 보여주었다. 프라하 전투콜린 전투에서 보병대가 탄약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로이텐에서는 탄약 수레를 전진 부대와 함께 이동시켜 신속하게 보급할 수 있도록 했다.[41] 덕분에 프로이센 보병대는 탄약 부족으로 인해 진격이 멈추는 일 없이 전투를 지속할 수 있었다. 또한, 프로이센 기병대는 보병대의 측면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오스트리아군의 재편성 시도를 저지하며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날아다니는 포병"이라고 불리던 기마포병대는 뛰어난 기동성과 화력 지원으로 프로이센군의 사기를 높이고 오스트리아군의 사기를 저하시켰다.[55]

로이텐 전투의 승리는 프리드리히 대왕에 대한 적들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 전투 이전에는 그를 폄하하는 호칭으로 부르던 적들조차, 전투 이후에는 그를 프로이센 국왕으로 존경하며 부르게 되었다.[56] 로스바흐 전투와 함께 로이텐 전투의 승리는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존경과 경외심을 안겨주었고, 이는 전쟁 이후의 평화 시기까지 이어졌다.

훗날 나폴레옹은 로이텐 전투를 "동원, 기동, 결단의 걸작"이라고 칭송하며, 이 전투가 군사 전략과 전술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44]

7. 한국적 관점

로이텐 전투는 18세기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거둔 대승으로, 군사 전략과 전술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특히,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기동성과 유연한 전술 운용을 통해 승리한 점은 현대 한국군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적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서, 과감한 기동과 집중을 통해 적의 약점을 공략하는 전략을 택했다. 이는 한국군이 주변 강대국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환경에서 국방력을 강화하고, 비대칭 전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해야 하는 현실과 맞닿아 있다.

또한, 로이텐 전투는 지휘관의 리더십과 병사들의 훈련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뛰어난 통솔력과 프로이센군의 잘 훈련된 규율은 전투의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이는 한국군에게도 지휘관의 전문성 강화와 정예화된 병력 양성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로이텐 전투는 한국군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준다.


  • 유연한 전술 운용: 제한된 자원과 병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기 위해,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전술을 변화시키고 적의 허를 찌르는 창의적인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 기동성 강화: 신속한 기동은 적의 예상을 깨고 주도권을 확보하는 데 필수적이다. 한국군은 기동성을 강화하여 전력의 효율성을 극대화해야 한다.
  • 지휘관 리더십 및 병력 훈련: 지휘관의 뛰어난 리더십과 병사들의 숙련된 훈련은 전투력의 핵심 요소이다. 한국군은 지휘관 양성과 병력 훈련에 지속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이러한 교훈을 바탕으로 한국군은 국방력을 강화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지키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8. 기념물

1854년에 프리드리히 대왕의 증손자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로이텐 전투에서 프로이센 군대의 승리를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는 로이텐에서 북서쪽으로 약 5km 떨어진 하이다우(Heidau, 현재는 실레시아주 브워니(Błonie))에 세워졌으며, 승리의 여신상이 있는 승전 기념탑 형태였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슈튈러가 기념비 디자인을, 크리스티안 다니엘 라우흐가 승리의 여신상 제작을 맡았다. 나이세(Neiße) 출신의 조각가 하인리히 멘첼은 현지 백색 회색 돌로 기둥을 제작했고, 모리츠 가이스는 주춧돌과 여신상을 아연 주조로 제작한 후 비토리아 여신상에 금도금을 했다. 기념비는 프로이센 국가 건설과 프리드리히 대왕의 신화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 걸맞게 높이가 약 20m에 달했다.[28]

제2차 세계 대전 중 또는 그 이후에 병사 또는 파르티잔들이 기념비를 다이너마이트로 파괴했으며, 2011년에 보수된 받침대의 잔해만 남아 있다.[29]

8. 1. 로이텐 전투 기념비

1854년에 프리드리히 대왕의 증손자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로이텐 전투에서 프로이센 군대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는 로이텐에서 북서쪽으로 약 5km 떨어진 하이다우(Heidau, 현재는 실레시아주 브워니(Błonie))에 세워졌으며, 승리의 여신상이 있는 승전 기념탑 형태였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슈튈러가 기념비 디자인을, 크리스티안 다니엘 라우흐가 승리의 여신상 제작을 맡았다. 나이세(Neiße) 출신의 조각가 하인리히 멘첼은 현지 백색 회색 돌로 기둥을 제작했고, 모리츠 가이스는 주춧돌과 여신상을 아연 주조로 제작한 후 비토리아 여신상에 금도금을 했다. 기념비는 프로이센 국가 건설과 프리드리히 대왕의 신화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 걸맞게 높이가 약 20m에 달했다.[28]

제2차 세계 대전 중 또는 그 이후에 병사 또는 파르티잔들이 기념비를 다이너마이트로 파괴했다. 2011년에 보수된 받침대의 잔해만 남아 있다.[2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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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논문 The Diplomatic Revolution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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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서적 Frederick the Great: A Magnificent Enigma Ticknor & Fields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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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서적 The Heart of Europe: A History of the Holy Roman Empire Penguin 2016
[31] 논문 The Diplomatic Revolution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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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서적 Frederick the Great and the Seven Years' War, 1756–1763 https://books.google[...] McFar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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